강한 서정성이 넘치는 선율이 흐른다.
푸른 들판이 펼쳐지고 파아란 하늘에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그림.
평화의 선율.
차분하면서도 그 속에 그리움이 녹아 흐른다.
분명 봄을 연주하고 있으나, 여름 소나기 지나간 흔적이 그려지는 건 왜일까?
피아노 덮개에 비친 손가락이 춤을 추고 있다.
"Shall we dance"라 했던가?
빠르고 경쾌한 구름이 게속된다. 그러다 갑작스런 멈춤과 연이은 평화로움이 밀려든다.
도입부의 한적함은 아니었을지라도 청중의 詩心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리라.
아름다운 영상과 시적인 계절을 표현하면서 피아니스트 조지현의 "자연의 숨결"은 시작된다.
요즈음이 추세가 보여주는 음악을 추구하는 추세여서인지 소개부터 곡 소개까지 모조리 영상으로 펼쳐진다.
계절의 특징을 잘 잡은 영상을 배경으로 그 안에 詩가 있고, 영상과 글이 아닌 또다른 무엇이 있다.
관객들은 이미 그녀의 연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관객들이 감정을 저만큼 끌어 올린 뒤 연록색 드레스 차림의 고운 피아니스트 조지현이 등장했다.
연록색 드레스와 검은 피아노.
강렬한 색의 대비가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택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그리고 겨울이 곁에 왔다. 쓸쓸한 듯 느껴지는 피아노의 구름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처럼 느껴진다.
느리고 약간 무거운 듯하면서도 가벼운 건반 위의 춤사위.
유키구라모토의 선율이 연상되는 건 무엇때문인가?
흐르는 여운의 끝자락 어디쯤 애끓듯 끊어지기 전에 울리는 다음 선율이 오묘하다.
여운을 길게 남기는 주법은 유키구라모토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와 주제 그리고 연주곡의 정서가 모두 그러한 정서와의 차별이 없다.
극적인 느림과 여운, 그러다 밝고 경쾌한 선율로 이어지고,
삶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희열을 느낀다.
이런 감정을 법정스님은 충만이라 했던가?
굳이 어려운 테크닉을 구사하기 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주법. 자연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진다.
마치 한 폭의 한국화에서 느끼는 여백/여운의 美를 담았다.
청중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테크닉으로접근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고 서정으로, 여운으로 스며 들었다.
극적인 여운 뒤의 속주. 그 대비가 여유로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폭포수 쏟아지듯 내지르는 외침같으나, 이내 잔잔한 흐름소리다.
여운의 길이가 짧은 듯하다가 처음과 긑은 긴 여운의 꼬리가 혜성의 그것처럼 이어진다.
피아노로 여운과 여백을 그려 놓을 수 있다는 건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
음악이 공간을 채우는 예술임을 생각한다면 굳이 어렵지 않을 것이나,
채움이 아니라 여백을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내공과 서정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대비를 통하여 공간을 여백으로 채운다는 건 듣기만 했던 나에게 새로운 소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여행이다.
때로는 타지마할의 노을을 보는 듯하다.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실력가임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글을 쓴다는 것도 여백을 채우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또다른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글로써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건, 피아노 선율로 공간을 채우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새로운 美를 창조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오늘, 공간 속에 채워진 무엇이 아니라 충만한 여백을 보았다. 꽉 채워진 듯 하지만, 비어 있으며 비어 있는 듯 하지만, 결코 비워져 있지 않는......
어쩌면 산다는 것도 인생이란 공간에 여백을 채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아무런 의미없는 여백이 아니라 여백으로 인해 충만할 수 있는 삶을 채워가는......
여백으로 채워지는 人生은 참 아름답고 내적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굴하지 않는다.
그것의 속성이 텅빈 것이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빈 것이 아닌 "텅빈 충만"인 것이다.
나는 이런 감정으로 몰입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음악이 있어 좋다. 클래식 그중에서도 서정성 강한 피아노 선율은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음악회는 이런 감정을 되새기고 반성하며, 삶을 관조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흐르는 곡을 아름다운 배경 삼아서 배우고 사랑하는 시간여행인지도......
퉁퉁 튕기듯 내쳐지는 소리. 뒤에 따르는 구슬 구르는 소리.
소리의 아름다움은 소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실려 전해지는 여백에 있음을 오늘 이 시간, 조지현의 "자연의 숨결" 음악회는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소리의 강약과 맺고 끊김, 빠르고 느림, 높고 낮음이 우리의 감정을 이국적 정취나 꿈꾸는 세계로 내몬다.
그래서 소리 여행은 언제나 충만이다.
소리로 인생 혹은 삶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대단하다.
미술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이라는 재료 외에도 다양한 기법고 도구가 동언될 수 있지만, 소리는 단 한 가지 악기로만 표현해야하는 제약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에 다양한 소리를 접목할 수 있겠으나, 그건 또다른 쟝르의 창조라 해야 옳은 일일 것이다.
잠시 intermission이 있었다. 함께 한 친구가 intermission은 관객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연주자를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서로에게 좀 더 충실히 다가서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소중한 시간이다.
들꽃이 하나 둘 싹을 틔우면 기지개를 펴듯 피어 오르는 모양새를 피아노 건반이 보여준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대지 위의 생명력의 存在. 절제하는 듯한 느낌은 생명의 태초 탄생의 고통.
콰쾅하는 전율과 떨림. 물방울이 어둠 속에서 간간히 한 방울씩 떨어지듯이,
그러다가 완전히 멈춘다.
복잡한 내면세계를 그리는 듯 소리 역시 반복인 듯 하다가 다시 다른 선율이 흐른다. 섞임인가? 혼돈인가?
혼란스런 모습의 형상을 소리로 재현하는 듯하다.
약간 추상적인 연주법인 듯 일반인들은 다소 이해하기 난해한 선율이었다. 그러나 그런 창작물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이 나는 뿌듯할 수 있었다.
작곡가 백영은의 작품은 마치 혼돈과 어둠의 연속인 블랙홀의 세계를 들여다 보여준 듯 하다.
이젠 <거울>로 이어진다.
부드러운 구름에서 간간히 짧은 멈춤과 구름의 연속선.
소리를 글로 표현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
어쩌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거울은 자신의 외면을 보는 도구이나, 그 속 표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것이 거울이기도 하다.
비록 자세하고도 상세히 들여다 볼 수는 없겠지만, 대충의 짐작은 거울에 비친 얼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도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란 작품집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투영했었다.
여기서 거울은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징적 이미지다.
그런 거울을 소리로 표현한 것인가? 서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차가운 느낌과 냉정함이 섞인 듯 하나, 거기에 약간의 따뜻함이 남은 듯하다. 절묘한 어우러짐의 표현.
열정적인 느낌보다는 냉정함이 지배한다.
바쁜 일상이나 여유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복잡한 세상을 표현한 듯 했다.
추상적 개념의 음악적 승화로 인하여 이해의 깊이는 얕기만 하여 선뜻 다가서질 못했다.
하지만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려한 시도와 실험 정신은 그대로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서정성과 대중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나만의 독창적 세계를 꿈꾸는 시도가 돋보였다.
뒤이어 연주된 곡은 앞의 곡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메세지는 전해 이해하지 못했다.
연주되는 내내 무겁고 장중한 분위기가 억누르고 있었고, 마음 또한 그와 같았다. 마치 레퀴엠 같은 장엄한 곡이었다.
어렵고 힘든 곡.
시작은 경쾌하고 가벼운 세계, 밝은 세계였으나, 마무리는 어둠과 혼돈이 자리잡은 또다른 세계였다. 회색지대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 모두가 자연의 숨결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비록 아름답고 밝음을 꿈꾸지만, 엄연히 그 반대의 세계, 그 반대의 자연의 모습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연이 숨결인가?
우리가 이 둘을 모두 받아들여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삶은 더 알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싫던 좋던 엄연히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자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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