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꾸는 꿈/책장을 덮으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최순우관장님을 떠올리며

꿈살이 2006. 1. 13. 00:53

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처음 접한 것이......

그때는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막 베스트셀러를 보일 조짐이 있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간 아마추어 사학자이신 류민형선생님과 여러차례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전설과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때였습니다. 사실 류선생님의 해박한 문화재관련 지식과 해설에 반해 쫓아 다녔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씩 관련 서적들을 탐닉하다가 책을 모으는(읽는게 아니라) 취미가 붙어 버렸습니다.

그런 중에 접했던 이 책은 나를 전율속에 빠뜨렸지요. 아름다운 글귀,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예쁘고 딱 맞는 우리 글을 이렇게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 정서를 어쩜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기왓장, 도자기 하나에서 이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을까?

그 때 전 최순우 관장님께 푹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쓴 글과 강의테이프까지 수소문 끝에 구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완전히 팬이 되었지요.

한번 뵙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그 전에 이미 돌아가신 뒤여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후로 저는 무량수전의 4계를 촬영하기 위해 여러 차례 영주의 무량수전을 방문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을에 촬영한 한 컷만 제 마음에 들 뿐, 무량수전은 제게 쉽게 다가오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가을비가 주저리 내리던 날. 무량수전 뒷편으로 대숲이 우거져 있고 이 대숲 사이로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이 오솔길을 걷노라면 바지가랑이에 스치는 대소리가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댓잎에 닿는 소리까지도 가슴에 아립니다.

 

무량수전 처마에서 황토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절간 쪽마루에 앉아서 듣는 즐거움도 솔솔합니다. 즐거움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귀를 참으로 맑디 맑게 해 줍니다.

 

이런 분위기를 접하지 못한 분은 절대 이해하질 못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느낀다"고 하는가 봅니다.

이 소리와 분위기에 반해 지금도 가끔씩 비가 오면 그 소리를 가슴으로 느끼곤 합니다.

당시 최순우관장님의 숨결을 따라가던 그 시절을 그리면서 여기에 제가 좋아하는 대목을 잠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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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崔淳雨님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