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3년전부터 우리 文化와 歷史를 이해하려는 바람직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접하곤 하는 文化財를 이해하고 硏究하며 踏査하는 일련의 움직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하다.
몇년전 우리 文化와 歷史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일깨워 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부터 촉발된 이러한 우리 文化와 歷史에 대한 관심의 붐을 타고 歷史小說 역시 새로운 우리 문화인식의 한 쟝르로서 합류하였다.
소설 「택리지」역시 그 흐름 속의 한 부류이다. 하지만 흥미위주의 다른 歷史小說과는 다른 점이 있다. 우리에게 새로운 歷史意識의 장을 열어 준 것이다. 이 책이 李重煥의 "택리지"의 내용중심이 아닌 이중환이란 저자의 삶을 중심으로 쓴 것이어서 조금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몇 백년전의 歷史意識의 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간 흥미 있고 흥분된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중환의 삶과 택리지가 세상에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느낀 점을 적어 본다.
淸潭, 靑華山人, 이중환의 택리지는 제목이 「八域志」, 「山水錄」, 「八道秘密地誌」, 「東國山水錄」, 「八域可居處」, 「四民總論」등 수십 가지로,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필사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다가 인쇄 본이 나오게 된 것은 근세의 일이다.
택리지는 地理書인데,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 風水를 가미한 人文, 自然 地理書이다.
우리 나라 팔도의 歷史, 地理, 地勢, 氣候, 산물, 인물, 취락 등은 물론, 살 만한 곳과 살 만한 곳이 못되는 곳을 설명하고,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 地理, 生理, 人心, 山水 네 가지를 들어 자세히 기술하였다.
저자 李重煥. 성호 이익이 지은 이중환의 “묘갈명”에 따르면 이중환은 어려서부터 詩材가 뛰어나 문중의 촉망을 받았는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스물 세살에 登科하여 장래의 棟梁之材로서 조정에서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휘조(字) 이중환이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 正字로부터 출발, 김천 찰방을 거쳐 승정원 注書로 있었는데, 경종 즉위 시에 承旨의 의례기록에서 禮官의 실책을 발견하고 경종에게 절을 하지 않아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곧바로 경종이 실책을 깨닫고 자리를 떴다가 다시 즉위식을 올려 이 때부터 중환은 조정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휘조는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신임사화가 일어나, 김천 찰방 시절에 사화의 하수인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준 것이 화근이 되어 의심을 받자,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당파에 휘말린 옥사는 그를 절도로 귀양보냈다.
이후 그는 30여년동안 팔도를 누비며 풍찬 노숙(風餐路宿)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사대부는 없고, 농. 공. 상도 없고, 또한 살 만한 곳도 없으니, 이것이 땅아닌 땅(非地之地)"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중환이 조정에 발탁될 시점인 조선후기의 조정은 남인, 서인, 노론, 소론 등의 사색당파로 나뉘어 朋黨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었다. 틈만 나면 상대를 헐뜯고 모함하여 인재를 불문하고 자기 붕당쪽 사람만을 등용하려 하였고, 밤낮으로 귀양보내고, 상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國事를 다스리는 조정이 이러할 진대 백성들의 삶인들 어떠할까?
오늘의 政治가 이와 다를 바 없어 歷史앞에서 다시 한번 곱씹어 볼일이다.
民心은 天心!
각 地方마다 환곡등 삼정이 문란하였고, 地方官吏들은 뇌물과 부정에 혈안이 되어 백성의 편안함과 안락함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한마디로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全國 八道에서는 民亂이 끝이질 않았고 때로는 이러한 민란이 朋黨政治로 쫓겨난 무리들과 결합하여 혁명을 내세우며 관군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논과 밭을 버리고 고향을 등진 채 민란에 가담하거나 산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도 이 때의 사람으로 이중환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활약을 뒤집어 보면 그 만큼 관리들의 부패가 심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핍박받고 궁핍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중환은 朋黨에 속하지 않았지만 붕당정치로 인해 조정에서 물러난 후 다시 출신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이를 뿌리치고 선비정신을 굽히지 않은 남다른 기질과 고집이 있었다.
淸潭이 「해동팔도지도」와 「동국지도」를 작성한 지리학자 농포자 정상기를 만나 백두산을 踏査할 시에 있었던 일화에서 그의 앞선 歷史意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청담이 全國 八道를 답사할 이 시기에는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인 지라 남루한 차림의 두 장정이 다니기만 하여도 염탐하러 다니는 민란주동자로 오해를 받아 죄인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 만큼 시대는 어지러웠던 것이다.
시대가 어지러우면 믿음이 없어진다. 당시는 「정감록」의 비기가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었기에 조금만 수상하여도 관에서 잡아 들여 심문하였다.
淸潭이 안변부사에게 鄭鑑錄과 관련한 民亂주동자로 오해를 받아 붙잡혀와서 부사를 호통치며 한 말에서 그의 歷史를 보는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歷史란 과거를 알리는 거울이요, 미래를 비추는 투시경이요, 현실을 양념한 값진 요리라오. 歷史를 늘 사생활처럼 간직하고 사는 습관을 들여야, 官吏들을 그 歷史가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보오. 歷史를 망각하거나 도외시하는 자들이 있어, 歷史는 망가지고 찢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며 숱한 고난을 겪게 되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歷史가 망가지지 않도록 잘 지킬 의무가 있소. 후대에 넘겨 줄 선물은, 망가지거나 찢겨진 역사를 넘겨주지 않는 것뿐이라오."
청담의 날카로운 깨우침은 오늘날의 歷史意識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청담은 老子의 自然思想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經世致用의 實學을 가진 선구자적 선비였다. 出世와 立身揚名을 최고의 길로 아는 朝鮮時代에 八道를 두루 踏査하여 살피는 그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져온 風水說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이용하였다.
백성들의 삶과 애환도 숯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地域의 형세와 人心, 文化, 풍속도 기록하며 八道를 踏査, 記錄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모아 검토하고 여러 서책들을 참고하여 팔도지리서인 택리지가 탄생된 것이다.
팔도총론, 복거총론, 사민총론, 총론의 순으로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는 歷史, 地理, 文化, 山川, 풍속, 인물, 정치 등과 함께 사화와 붕당의 폐해등 비판의 글도 실었다.
우리의 땅을 설명하며, 自然環境을 人文環境과 관련시켜 당대 실학자들의 과학적 태도에 접근하려 하였는데 이는 자아인식의 발로였다.
이 책이 나오자 實用, 實正, 實證의 종합적 학문 경향을 서양의 과학적 사고에서 도입하여 發展시키려는 실학파들에게서 경이적인 찬사를 받았다.
歷史란 未來를 위한 거울이다. 불확실한 未來는 計劃을 세움으로서 확실한 未來로 가능케 하고 나아가 예측 가능케 한다. 그러나 그 計劃의 치밀성에 따라 未來의 확실성이 더욱 명료하게 되는 데 計劃의 치밀성이란 것은 過去를 바탕으로 한다.
過去를 살펴보고 이해하므로서 計劃은 더욱 치밀하게 되고 그런 치밀한 計劃은 우리에게 확실한 未來를 보장한다.
오늘날 歷史意識이 새롭게 꿈틀거리는 이 때에 수백년전에 벌써 답사로서 기록한 택리지란 人文, 歷史 地理書를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못난 후세 사람들인지라 이제서야 우리의 歷史와 文化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음이 부끄러울 뿐이다.
주)1990년대 중반 즈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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