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꾸는 꿈/살아 숨쉬는 내가 되기 위해...

대화의 상실은 죽음

꿈살이 2007. 5. 14. 20:54

 

 

지직지직. 의미없는 TV소리.

 

따로따로 놀고 있다. TV는 아무 의미없음을 보여주듯 번쩍거리는 그 무엇으로 저 혼자 소리지르고, 아들은 신문을 보고 있다. 아버지라 이름지은 가장이 찾아도 대답은 커녕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

 

식사도 각자 따로따로. 선지국이 메뉴라지만, 어디 그것이 제 맛이나 나겠는가? 한 숟가락 떠다만 아빠.

 

정신없이 TV채널을 리모콘으로 변경해 보지만, 아무 것도 없다. 어디에도 없다.

 

얼핏 가족의 중심에 TV가 있는 듯 보이나, 때로는 신문이 가족의 중심인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가족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대화? 사랑?

 

그 자리를 신문이 대신하고, TV가 대신한다. 그나마 오가는 말 속에도 마음은 없고 빈 말의 껍질들만 오간다. 그 껍질들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단발성 화제만 내뱉고 그나마 겨우 찾은 떠다니는 다양한 소재 역시 홀로 나뒹군다. 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 다름아니다. 어디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들 대진 역의 김상일) 

 

 

 

아빠 : 엄마 어디 간다고 하던?

아들 : 몰라요.

아빠 : 안 물어봤어?

아들 : 네

아빠 : .

 

관심과 캐묻는 것의 차이? 가족은 오래 캐물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으로, 언제, 어디로, 왜, 누굴 만나러 간 것인지에 대해 전혀 관심없는 아들.

 

그것이 엄마란 존재이고, 그렇게 대답듣는 것이 아빠란 존재란 말인가?

 

엄마의 외출에 전혀 관심없는 아들과, 출근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이 시간이 주는 답답함에 미칠 것 같은 아빠.

 

"모자람을 모른다면 완전함을 알 수 없다"고? 

 

그래. 어쩌면 이 가족은 모자람을 모를지도 모른다. 무엇이 부족한 지, 무엇이 필요한 지 전혀 모른 체로 이렇게 일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니 사랑과 대화에 익숙치 않은 것이고, 익숙치 않은 것은 시도됨이 없이 그대로 굳어 무관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필요한 것도 없다. 외면? 소외?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자신이 직접 산다는 것에 익숙치 않은 아빠. 가족은 서로에게 의지가 가능한 것. 그러나 가족의 해체시에는 각자 필요한 것을 스스로 구입하며 살아야 한다. 각자 필요한 것을 스스로 구입한다는 것은 어쩜 가족이 없다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대화가 없는, 소통이 없는 가족. 그렇다면 일가를 이룬 것인가? 피만 나누었다면 가족인 것일까?

 

(아빠 종식 역의 민경현) 

 

일찍 외출하는 것을 어색해 하는 아빠의 직업은 전직공무원. 정년퇴직후 집에서 쉬다 보니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방황하고 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어색해 하는 어정쩡한 위치이다. 

 

함께 외출하자는 아빠의 제의를 거절하는 아들. 아들에게 외출은 싫고 귀찮은 것에 불과하다. 훨씬 이전부터 단절된 시간이 오래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오랜 시간 소통없이 단절된 채 살아온 이유는?  누구의 모습인가?  

 

변화없이 무미건조한, 반복된 일상이 좋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소외를 즐기는 것인가?

 

버스나 지하철안에서 모르는 승객들과 마주치면 어색하니 창밖을 보거나 광고에 집중한다. 소통의 단절을 이렇게 표현하는 작가의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생활과 현실에서 비껴나 앉아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는 그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의 주인은 나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여자친구 성은 역의 최정은) 

 

아빠가 외출한 후 아들은 사귀는 여자친구에게 전화해서 집이 비었다며 오라한다. 그렇다면 그는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그 자신은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상 백수인 그는 스스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자신을 소외하고 있다. 아무 의미없는 일상들을 전화로 주절주절되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아무 의미없는 문자메세지나 잡스런 통화로 그 소외를 즐기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무엇이 다른가? 

 

최첨단을 위한 소통의 도구를 가지고서 사실은 진정한 소통을 못한 채 소통을 죽이고 있다.         

 

여자친구가 왔지만, 의미있을 것처럼 가장되어 관객이 속기 쉬운 철학적 언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질문과 대답들. 그러나 그것은 소통이 아니었다. 아무런 정보도 의미도 마음도 진정성도 없는 한낱 단어의 조각에 불과했고, 수다조차 되지 못했다. 외출나간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 올 지에 관해, 영화 사랑과 영혼은 귀신이 나오고, 복수하는 장면이 있기에 공포영화라는 것에 관해, 기타 등등 많은 것들이 오고 갔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

 

행동해서 저지른 죄와 행동하지 않아 생기는 죄의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제법 철학적인 듯 하나 황당한 말들의 집합과 성적인 내용에 관한 것들이 난무했다.

 

심오한 듯 보이나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쉬면서도 바빠를 외치는 아들. 쉬지 못했다고 절규하며 지쳤단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는 천사보다 규칙을 따지지 않아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는, 그래서 편한 악마가 낫단다. 

 

세상에 대해 나이만큼 물어본다? 점점 의문이 많아지고 질문의 쏟아짐 속에 생을 마친다.

 

철학적인 듯 하지만 의미없는 결론은 필요없는, 그저 질문에 불과하다.  

 

결국 아들과 여자친구가 소통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섹스 뿐이다. 적나라한 외설적 대사와 맞닥뜨려 관객의 민망함을 이끌어 낼 즈음 아빠가 귀가하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외출해서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사온 이유에 대해 아빠는 퇴직후 아내와 등산하기 위한 것임을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퇴직후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아내만 찾은 무료함의 아빠. 쉼이 어색하다. 적응이 안된다. 아내가 모든 것을 대신한 것이다. 대신해 준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은 어디있는 것인가?

 

출근할 때에는 필요한 것을 모두 아내가 구입해 주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구입한다? 그에게 가족이 없어졌음을 암시한다.

 

문득 아빠는 아내가 남겨둔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한다. 연인과 섹스하다 들켜 과거 낙태경험까지 엄마가 다 쓴 줄 아는 아들의 상황과 이혼을 통보하고 외출한 아내의 갑작스런 반항에 충격받은 아빠의 상황이 묘하게 엇갈리며 비껴간다. 서로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둔 아들과 아빠의 긴장된 대화이지만 비껴나 앉은 대화의 조각들이 어느 정도 교묘하게도 아귀가 맞았다.

 

그러나 그 편지는 이혼서류. 아들에게는 백수 생활의 끝마침과 영화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하는 상실의 상황이고, 아빠에게는 삶의 끝장과도 같은 충격적 상황이다.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아빠는 생각을 해야 한다며 장난이 아닌지, 꿈은 아닌지 되뇌여 본다.

 

 

(변호사 이사연 역의 이혜연)  

 

그러나 지난 30년간 남편의 폭거에 대한 반항에서 자유를 구하고자 한다는 아내. 때마침 나타난 이혼전문변호사가 이혼서류에 도장 찍을 것을 요구하며, 그 이혼사유를 설명한다. 남편은 이혼사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아내와 만나 대화를 하겠다며 만남 주선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성실히 살아온 것으로 여겨지는 두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지금껏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살아 왔다는 남편과 가족 공동체에 어울리기만 했지 가족을 위해 "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아내.

 

(아내 경옥 역의 박영미) 

 

돌아온 아내가 전해준 이유는 결국 자신은 가족공동체에 어울리기만 했을 뿐 "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왜 지금이냐는 남편의 주장에 대해 아내는 보기 싫었던 남편이 지난 30년간은 출근했기에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퇴직한 지금은는 매일 보아야 하는 고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저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걷도는 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성이 담긴 가족간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며, 그 소통은 지금부터 연습하고 노력하고 또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소통의 전제는 사랑이이며, 사랑이 담긴 소통의 방법은 대화와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감싸안아 주는 것이다. 즉, 대화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극중에서 아들의 여자친구가 "살인도 소통이다!"라고 말할 때 섬찟했다. 연극을 관람하면서 내가 얼마나 가족간에 소통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것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가족을 해체하는, 인간관계를 해체하는 내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의문을 품었었던 연극의 제목이 "선지(짐승의 피)"인 이유는, 언어 즉 대화의 부재 혹은 상실은 결국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짐승의 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짐승의 피가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