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음악'하면 대부분 교향곡 6번 <비창>이나 4번, 5번 교향곡 그리고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같은 발레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가곡을 백여 편 넘게 작곡하고 오페라를 열 편이나 쓰는 등 성악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작곡가였다.
평생을 '좋은 오페라 소재 찾기'에 몰두한 그는 어느 날 콘트랄토(여성 최저음) 가수인 엘리자베타 라브로프스카야에게서 푸슈킨의 운문소설인 <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in)>을 작곡해 보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날 밤 소설을 밤새워 두 번이나 연거푸 읽은 차이코프스키는 "그래, 이거야!"하며 작곡을 결심한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가 특히 감명 받은 것은 시골의 순박한 처녀 타티아나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도시의 청년귀족 오네긴에게 반해서 밤새도록 장문의 연애편지를 쓰는 장면이었다. 문학소녀 타티아나는 책 속의 일로만 생각했던 '백마 탄 왕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당시 러시아 상황에선 가히 파격적인 열렬한 연애편지를 쓴다.
"다른 사람, 아니 세상에서 당신 이외에 제 마음을 바칠 남자분은 없어요! 그것은 벌써 하느님의 섭리로 정해진 일, 하느님의 뜻이에요.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지금까지 저의 일생은 둘이 반드시 만나기 이한 저당이었죠.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보내 주신 분, 일생 저를 지켜 주실 분이에요......."
결국 차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먼저 작곡하는데, 이렇게 탄생된 아리아가 바로 타티아나의 '편지의 아리아'이다. 약 12분 동안 계속되는 이 아름답고도 드라마틱한 아리아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와 함께 오페라 역사상 가장 긴 여성 아리아로 평가 받는다.
그런데 이 때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운명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모스카바 음악원의 여학생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타티아나의 편지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열렬한 사랑고백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오네긴에게서 냉정하게 거절당한 타티아나의 처지를 깊이 동정하고 있던 차이코프스키는 밀류코바가 상처를 받을까 봐, 오네긴처럼 행동할 수는 없어 그만 결혼을 허락하고 만다. 그러나 동성연애자였던 그는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어 결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깊은 상처로 남는다.
![]() | ||||||||||||||||||||||||||||||||||||||||
|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백미로 불리는 푸슈킨의 '타티아나의 편지'는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성공으로 차이코프스키에게 명성을 안겨 주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쓰디쓴 독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장일범(음악평론가), 좋은생각 1999.12월호 -
『명곡의 전당-오페라/성악곡 (go SNC)』 497번
제 목:[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 차이코프스키
-----------------------------------------------------------------------------
[문호근의 오페라 이야기]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러시아 젊은이들의 잔잔한 사랑과 마음 속의 이야기
'예브게니 오네긴'은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
'유진 오네긴'이라고 영어식 이름으로 불렀는데, 러시아 문화가 전보다 대
하기 쉬워지면서 본 이름을 찾았다고 하겠지요.
오네긴이라는 사람은 한마디로 한량입니다. 돈 있고 지체 있는 집다안에
태어나서 글줄이나 읽었고요, 젊은 시절의 환락과 방랑도 적당히 맛본, 그
런 사람이지요. 오네긴이 놀던 물은 페테르부르크, 러시아에서 가장 화려
한 사교계였죠. 그러던 그가 아주 한심한 시골에 얼마간 머물게 되는데,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이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 타치아나입니다.
타치아나, 우리에게는 멋있는 이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러시아의
한 평범한 이름, 시골처녀입니다.
그냥 '시골처녀'는 아니구요,뭐랄까... 시골에 살기는 하지만 더 넓은 세
계를 꿈꾸는 처녀. 일종의 문학소녀입니다. 그래요, 시골에서 문학소녀가
되려면 돈푼깨나 있는 집안이어야겠지요. 꽤 큰 지주댁의 귀여운 따님입니
다.
대도시에서 굴러먹던 한량과 순진한 시골의 문학소녀와의 만남,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오네긴이 여기 시골에 와서 만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서
렌스키라는 사람과는 좀 자주 만나서 친구가 됩니다. 친구가 되려면 나이
도 대충 비슷하고 취미도 뭔가 통해야 하지요.
렌스키는 비록 시골에 살지만 늘 글을 읽고 쓰고 하면서 보다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생각될 때면 몇 줄
시로 정리해 두곤 하지요. 그래서 스스로 시인이라고 자처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이 한때 문학에 심취했던 오네긴과 친구가 되게 한 것입니다.
또 한편 오네긴과 렌스키는 둘 다 젊은이로서 젊은 여자에 대한 관심도 같
이 할 수 있었습니다. 렌스키는 어릴 때부터 사귀어온 올가라는 아가씨와
사랑을 하며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데, 오네긴이 이 시골에서 적당한 짝이
없는 것을 알고는 올가의 언니인 타치아나를 소개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중요한 등장인물 소개가 끝나버렸군요. 네, 이 네 젊
은이의 사랑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오페라의 뼈대를 이루어
줍니다. 자, 막을 열어 보겠습니다.
1막
1막입니다. 오페라는 아주 한가롭게 시작됩니다. 러시아의 시골, 추수가
끝날 무렵의 지주댁의 오후, 어떤 장면이 연상되세요?
농부들은 모두 들판으로 일하러 나갔고, 뎅그라니 큰 집안에서는 안주인과
여자들 몇이 일꾼들 먹일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손길이 분주한 풍경...,그
런데 여기에 때아니게 예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시골집이기는
하지만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사는 아가씨들, 타치아나와 올가가 낭만
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목소리 맞추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랫소리를 들으며 일하고 있는 이 집 안주인 라리나와 늙은 유모 필리
프예브나는 옛날 생각에 잠깁니다. 아, 나도 젊은 시절에는 저런 노래를
부르며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꿈꾸었었는데..., 이제는 사랑했던 남편도
죽고, 이제는 그저 습관처럼 살게 되었지. "사랑이 없어진 곳에 습관을 내
려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이것이 두 중년 여인들의 결론입니다.
일하러 나갔던 농부들이 돌아옵니다. 러시아 농부가를 부르면서..., 한없
이 펼쳐져 있는 러시아 평원에 울려퍼지는 저 끈질긴 힘의 목소리, 그런데
그 노래의 내용은, "내 발은 너무 걸어서 아프고, 내 손은 너무 일해서 아
프다"는 것입니다. 네, 농부들의 삶이라는 것이 힘들지 않을 리가 있나요?
그들의 노래가 아무리 강건하고 아름답더라도 말이죠.
농부들은 추수가 끝난 홀가분함을 노래와 춤으로 즐기는데, 그 노래와 춤
에 대한 반응이 두 자매 사이에서 아주 딴판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소녀 타
치아나는 아득하고 순박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데 비해서, 자연의 딸인
올가는 그 강한 리듬에 맞추어 한껏 춤을 추고 싶은 것이죠. 똑같이 자란
두 자매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까요? 하기는 두 사람 다 농부
들의 고된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웃에서 남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남자들? 올가의 약혼자 렌스키는 바로
어제 다녀갔는데, 오늘 또 나타나면서 웬 낯모를 신사를 대동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평원, 외따로 떨어진 이곳에 농부가 아닌 사람들, 신사라고 부
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새 남자의 출현은 여자들끼리
만 사는 이 집안에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렌스키는 들어오자마자 올가를 붙들고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시인
답게 부르짖습니다. 올가가 겨우 어제 헤어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주지만 렌스키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시인에게는 하룻밤의 헤어짐도 영원
처럼 느껴진다나요?
한편, 타치아나와 오네긴의 만남은?
왜 이런 상황 있잖아요? 문학동아리 방에 솜털 보송보송한 새내기가 가슴
에 책 한보따리 안고 두려움과 호기심에 꽉차서 방문을 빠꼼히 열고 들어
왔을 때, 방을 차지하고 있던 대선배 아저씨가 볼 때, 녀석, 귀여운데...
그러면서 미소와 기대와, 그리고 일종의 짖궂은 장난기가 동시에 발동되는
상황.
한편 타치아나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자기는 문학이라는, 지성이라는
세계의 첫 달콤함에 황홀해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이 세상의 쓴맛, 단맛
을 벌써 다 맛본 듯한 표정으로 어느 날 뜻밖에 내앞을 저렇게 가로막고
나선 문학과 인생의 대선배, 그런데 그 사람은 멋지고 잘생겼고 또 나무랄
데 없는 몸가짐과 옷차림까지 갖추었다면...
두 사람은 살아가는 이야기, 문학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네긴이 이곳에 온
것은 친척 아저씨가 죽어가면서 유산을 자기에게 주겠다고 했기 때문인데,
그 아저씨가 죽기까지 병상을 지켜야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잘 알지도 못
하는 한 노인이 외롭게 죽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젊은이..., 답답하고 지루
했겠죠. 사실... 그러나, 그래도 자기에게 유산을 주려는 노인의 죽음을
"지루하게 기다렸다"라고 누군가 표현한다면 어쩐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오네긴은 그런 표현을 썼고,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이 멋진 남자
에게 타치아나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자, 여기까지가 첫 장면입니다.
이 오페라는 이런 오페라입니다. 무슨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큰 인물이 큰 감정을 쏟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의 마음
속의 이야기, 미묘한 마음 속의 떨림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
나 겪고 지나가야 하는 젊은 시절의 이 마음 속의 사연이라는 것은 사실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요? 어른이 된 다음에 그때 일을 돌이켜보고는, 한때
의 어리석었던 감정이라고 코웃음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여린 마음의 소유자일까요?
차이코프스키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페라로 쓰고
는 '오페라'라고 세상에 내놓기는 너무나 부끄러워 그냥 '서정적인 장면
들'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란 작곡가의 작품인데 큰 오페라
극장에서 왜 공연할 수 없었겠습니까? 차이코프스키는 그러나 젊은 가슴의
소박한 이야기를 대학생들끼리 만드는 공연으로 해줄 것을 원했습니다. 말
하자면 아마추어 공연으로 첫선을 보이게 한 것이지요.
이 작품 창작에 얽힌 정말 가슴아픈 사연은 다음 장면, 타치아나의 편지
쓰는 장면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타치아나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유모 필리프예브나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유모는 그럴 기분이 아니지요.
타치아나는 묻습니다. 유모도 사랑을 하고 결혼했는지를...
사랑과 결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은 이 두 낱말은 그러나 필리
프예브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지요. 아니 망측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도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연애'라는 것이 공공연히 인정되고
더구나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그리 역사가 긴 얘기가 아닙니다.
타치아나는 지금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내가 오늘 오후 그분을
만나고 나서 느껴지는 이 강력하고도 야릇한 감정. 이 매우 특수한 마음과
몸의 상태가 과연 소설책에서 이야기하는 그 연애감정인가? 그리고 그 길
을 따라 여자의 일생을 맡겨도 좋은, 아니, 맡겨야 하는 그 상태일까? 이
런 의문입니다.
시골에서, 친구도 없이, 유행하는 책에만 의존해서 세상을 파악해야 하는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타치아나는 그분에게 편지를 쓰
기로 결심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 사실 자체가 관습을
깨는 대담한 일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랬고, 또 아직까지도 그렇지
않은가요? 관습을 깨는 것도 문제지만, 여자가 잘 모르는 남자에게 속 마
음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악용당할지도 모르지 않나요?
타치아나는 이런 여러 문제 때문에 밤새워 고민을 합니다. 그런 끝에 기어
이 편지를 쓰고 맙니다. 타치아나의 결심은 이렇습니다. 그래도 난 부모가
정해주는 낯모르는 남자를 소개받아 내 몸을 맡기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
려나갈 수는 없어. 나는 내 길을 갈테야. 그분이 나를지켜주는 천사일지,
나를 유혹하는 한 야비한 남자일지 확신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는내 길을
가고 말거야!
새벽이 되어 탈진한 상태에서 타치아나는 유모에게 편지를 전해줄 것을 부
탁합니다. 아, 새날은 밝아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
다. 두렵고 떨리지만 큰 희망의 새날이기도 합니다.
장면이 바뀌어 타치아나는 오네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네긴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소녀의 열정이 담긴 편지를 정중히 돌려
줍니다 돌려줍니다. 왜 그 편지를 받을 수 없는지 설명합니다. 첫째로 나
같이 닳고 닳은 남자는 좋은 남편감이 될 수 없다는 것. 그 말은? 나는 너
하고 급이 다르기 때문에 사랑이니 장래니 하는 것이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소녀가 열정을 함부로 내보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이런 큰오빠 같은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타치아나의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얼음덩이가 쿵 내려앉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그런 여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이 운문으로 쓴 원작 소설을 차이코프스키는 오페
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차이코프스키는 긴 사연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를 사모해 온 젊은 여인의 사랑을 고백한 편지였습니다. 차이
코프스키는 이 타치아나의 것 같은 편지를 받고 오네긴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한 순진한 여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일 수
있는지를 작곡하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작곡을 중단하고 그 여인을 만납니다. 결혼할 만큼의 사랑
이 마음 속에 자라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차이코프스키는..., 단지 오네긴
처럼 할 수 없어서..., 그 여자와 결혼합니다.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차
이코프스키는 생리적으로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 동
안 극심한 고통을 당한 후 차이코프스키는 그 여자로부터 탈출하여 정신의
냉정을 찾게 됩니다. 그제서야 중단했던 이 오페라에 다시 손을 대어 비로
소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치아나의 편지 장면은 차이코프스키가 얼마나 이 타치아나의 마음을 깊
이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썼는지를 잘 깨닫게 해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
면입니다. 이 오페라 전체의 가장 중심적인 장면이기도 하지요. 그후, 그
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막
타치아나의 생일파티에서 오네긴은 올가를 유혹합니다. 순전히 악동심리지
요. 사실 자연의 딸 올가는 시인 렌스키의 낭만적인 사랑을 그대로 받고
있을 수만은 없는 그런 여자였지요. 렌스키는 격분하여 오네긴에게 결투를
청합니다.
러시아 겨울의 새벽, 시인 렌스키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내가 생각했던 사
랑, 내가 바랐던 우정이 무참하게 깨졌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아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가, 너를
사랑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는 오네긴의 총탄에쓰러져 죽습니다.
오네긴, 결투 약속을 해놓고 밤새 술 퍼먹고 나타난 새격, 친구를 향해 차
갑게 총을 쏠 수 있었던 그, 그런데 정작 사람이 피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니까, 죽어가는 렌스키의 젊은 몸을 내가 껴안고 있는 동안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서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사실 이 친구 뭐야?
진짜 친구도 아니었잖아? 시골에 잠시 머무는 동안 소일 삼아 만나던 청년
에 불과한데..., 그헤게 생각하면서도 그 죽음이 나한테 이다지도 무거운
짐과 죄의식으로 오랫동안 남을 줄이야...
3막
오네긴은 긴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그렇죠. 그건 도피여행이었죠. 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신심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다시 그때 그 사교계의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낸 날, 뜻밖에도 그는 타치아
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타치아나는? 그동안 대부호 그레민 공작의 부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글쎄
요. 이 젊은 여인의 어딘가 세속을 떠난 듯한 차가움 뒤에 감춰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이 그레민 노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요? 타치아
나는 바로 그런 특성으로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되어 있습니다.
노인 그레민이 그런 타치아나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세상에는 온
작 풍파를 겪으면서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무뎌지고 딱딱한보호막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그런 식으로 늙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가다
삶의 경험이 깊어갈수록 다른 사람을 더욱 깊이있게 꿰뚫어보면서, 그 사
람의 과거의 잘못과 아픔까지도 감싸주고 포용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기적처럼... 내 젊은 아내의 쓰라린 사랑의 상처까지도 사
랑해 줄 수 있는 노인.
오네긴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시골의 한 처녀를 다시 발견하면서, 파
탄되어 온통 허물어져만 가는 것으로 알고 절망했던 이 러시아에서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을 발견하고는 맹렬하게 타치아나에게 달
려들어 사랑을 호소합니다. 사실, 잘못이죠. 사람에 대한 희밍을 다시 발
견했다면, 다른 관계로 새로 시작해야죠. 그러나 사람을 발견하고 싶어 읽
고 공부하고 헤매고 다니고 방황하고... 끝내 인격파탄의 지경에 이르는
오네긴의 이 어마어마한 성격의 힘이 타치아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가요?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함을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도 동시에 확인합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행동하는 쪽은 타치아나입니다.타치아나는 결연히 오
네긴을 떠나고, 오네긴은 끝내 인격파탄자로 남고 맙니다.
차이코프스키가 겸손하게 내놓은 이 '작은 작품'은 세월이 갈수록 러시아
오페라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어 갔습니다.
러시아, 그후 혁명과 사회주의 체제 실험을 거치면서도 그 특유의 문화를
최고의 수준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나라,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회주의
체제가 물러가고 있는 지금, 이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러시아인의 사랑
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 여성 노동자가 그리는 마음 속의 인물로 푸시킨
과 차이코프스키가 그려낸 타치아나가 꼽힌다고 합니다.
『명곡의 전당-오페라/성악곡 (go SNC)』 498번
제 목:[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명가수와 명반
-----------------------------------------------------------------------------
[문호근의 오페라 이야기] '예브게니 오네긴'의 명가수와 명반
지적이며 정갈한 오네긴을 탄생시킨 러시아 바리톤들
박종호 / 음악칼럼니스트
주인공은 오네긴, 타치아나, 그리고 렌스키이며,또 한 명을 더한다면 그레
민 정도가 될 것이다.
젊은 열병에서 완숙한 사랑으로 성장하는 사려깊은 타치아나, 결국 자신에
게 지고 마는 이율배반적 정열의 오네긴, 조급한 열정의 렌스키, 그리고
관조와 체념의 나이에 사랑을 느낀 그레민. 이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사랑
의 모습은 모두 비극이 되고 만다.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네 가지의 마음이 투영된 분신으로 짐작할 수 있
다.
타치아나는 서정적이면서도 내적인 표현이 가능한 긴 호흡의 소프라노가,
오네긴은 지적이며 정갈한 스타일의 바리톤이, 렌스키는 멜랑콜리하면서도
열정적인 연기가 가능한 리릭 테너가 맡는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명가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러시아 국내
에서 시작하여 해외공연에 의해 국제적으로 유명해 진 러시아 가수들과,
서구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에 도전한 기성 구미 가수들이 있다. 하지만
전자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후자는 러시아 오페라가 그들의
주 레퍼토리가 아니다.
타치아나 역으로 첫손 꼽는 소프라노는 갈리나 파블로브나 비슈네프스카야
이다. 그녀는 구소련 출신으로는 드물게 세계 정상의 명성을 얻은 프리마
돈나였다. 볼쇼이가극장 단원으로 53년 '예브게니 오네긴'으로 이미 국제
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소련에서도 크게 인정받아 프로코피예프나 쇼
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들이 그녀를 위해 작곡을 했다. 하지만 역시 그녀
가 우리에게 친숙해진 것은 74년 남편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서방으로 망명하고 난 다음부터일 것이다. 그후에도 큰 활약을 했지만 그
녀의 전성기는 역시 모스크바 시절이다. 그녀의 최고의 녹음도 망명 전에
남편의 지휘로 녹음한 '예브게니 오네긴'(EMI)이다.
비슈네프스카야 이후 동구권 출신으로 최고의 타치아나는 라이나 카바이반
스카이다. 불가리아 태생의 그녀는 57년 타치아나로 데뷔했다. 한때 크게
슬럼프에 빠지자 정상에서 과감히 은퇴하여 로자 폰셀에게 2년간 사사한
후 재기, 소리보다는 연기파로 성공했다.
폴란드 출신의두 명의 테레사가 모두 타치아나를 잘 불렀는데, 질리스 가
라와 쿠비악이 그들이다. 테레사 질리스 가라는 69년 카라얀에 의해 잘츠
부르크 음악제에 기용되어 서방에 알려졌다. '돈 조반니'의 돈나 엘비라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그리고 타치아나가 그녀의 장기이다.
테레사 쿠비악은 72년 '토스카'로 대성공을 거둔 후 영국에서는 최고의 대
우를 받았는데, 혹자는 칼라스 이후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녀의 타치아나는 CD와 LD로 나와 있다.
불가리아의 안나 토모바신토우는 애당초 메조였는데 소프라노로 바꾼 후에
도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그녀도 65년 타치아나로 데뷔했다. 만년
의 카라얀이 무척 애호한 가수인데, 노래는 무난하나 이렇다 할 스타 기질
이 없는 것이 단점이다.
볼쇼이의 주역가수인 마크빌라 카스라쉬빌리도 서방에 알려져 있는 러시아
의 중진으로 메트로폴리탄에서 타치아나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금년 7월
서울의 볼쇼이 갈라콘서트에 참여했다.
그 외에 서방의 스타로서 타치아나를 잘 부르는 소프라노로는 미렐라 프레
니와 제시 노먼이 있다.
오네긴으로 유명한 바리톤으로 폴란드 태생의 유리 마주로크가 있다. 공대
출신의 과학자였던 그는 63년부터 볼쇼이에서 활약하여 '예브게니 오네긴'
을 잘 불렀다.
영국의 토마스 알렌은 코벤트 가든의 인기 바리톤이다. 파파게노, 마르첼
로 등 가볍고 밝은 역을 잘 부르는 그는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
도 유명하다. 그의 오네긴은 음반(DG)이 나와 있다.
오스트리아의 베른트 바이클도 오네긴을 잘 부른 리릭 바리톤이다.특히 탄
호이저가 간판 역인 그도 오네긴의 녹음(데카)이 있다.
독일의 볼프강 브란델은 바이에른 가극장의 대표적 바리톤이다. 독일에서
주로 활약하는 그는 '마술피리'나 '박쥐'를 잘 부르는 밝은 미성인데, 탄
호이저나 오네긴도 정평 있다.
토마스 햄프슨은 음악적 교양이 풍부한 미국 출신 바리톤이다. 주로 부파
역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이지만 최근 오네긴도 녹음(EMI)했다.
최근 가장 기대되는 오네긴의 재목은 드미트리 호보로스토프스키이다. 오
랜만에 보는 러시아의 대형 바리톤인데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강하고 힘
찬 소리를 잘 조율한다. 필립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아주 빠른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그의 음악적 완성은 아직 미지수이다.
많은 러시아 테너들이 격정적인 렌스키를 노래했다. 알렉세이 마슬레니코
프는 볼쇼이 멤버로 렌스키를 많이 불렀는데, 65년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통해 서방에 알려졌다.
블라드미르 아틀란토프는 현재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러시아 테너
이지만 그는 러시아 스타일은 아니다. 깊은 감정과 엄청난 성량으로 요즘
은 주로 오텔로를 부르고 있는 그는 원래 렌스키가 주 레퍼토리였다.
92년 내한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주라브 소트킬라바도 렌스키로 유명했다.
그의 가창은 다분히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믹싱이라 할 수 있다.
체코의 페테르 드보르스키는 76년 이후 서구에 진출하여 스리 테너 이후
인기 있는 젊은 테너로 크게 주목을 얻었다. 그의 영역은 '예브게니 오네
긴'등 러시아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그 외에 서구 출신으로 렌스키에 잘 어울리는 주요 테너로는 영국의 스튜
어트 버로스, 오스트리아의 아돌프 달라포차, 그리고 미국의 닐 쉬코프가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비디오물로는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LD 1종이
다.
데카에서 발매한 이 LD는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하는 코벤트 가든(로얄 오
페라) 가극장의 연주이다. 이 극장의 관현악단과 합창단, 그리고 코벤트
가든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하는 솔리스트들이 주역을 맡고 있다. 오네긴에
베른트 바이클, 타치아나에 테레사 쿠비악, 렌스키에 스튜어트 버로스, 올
가의 율리아 하마리, 그레민에 니콜라이 갸우로프가 노래한다.
이 비디오물은 위의 연주진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녹음위에 다른 연기자
들이 소위 입맞추기 방식으로 연기만 하여 AV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유명한 가수들의 모습은 볼 수 없으며 현장감도 없
다. 하지만 대부분 야외촬영으로 제작되어 러시아의 대하 드라마 같은 하
나의 영화로서 크게 손색이 없다.
연출과 제작은 피터 바이글이 맡고 있는데, 그는 이런 방식으로 몇 편의
오페라 영화를 더 만들어 놓고 있다. 연기는 주로 체코 출신의 연기자들이
맡고 있다. 그들의 입모양이나 자세로 미루어 보아 성악가들인 것으로 짐
작된다. 물론 용모는 좋지만 연기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 쿠비악이나
바이클 또는 갸우로프의 외모를 생각하면 원가수들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
는 아쉬움이 든다.
화면은 맑고 깨끗하며 밝은 전원풍경이 볼만하다. 특히 눈 속에서의 오네
긴과 렌스키의 결투장면은 실제 극장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영화만의
장점이다.
가수들의 가창은 전체적으로 뛰어나다. 바이클의 하이 바리톤은 들을 만하
고, 쿠비악의 편지 쓰는 장면도 아주 잘 부른 장면이다.
올가 역의 율리아 하마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인데, 그녀
는 드믄 알토로서 심오한 일류 가수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레민의 니콜라
이 갸우로프도 노련한 베이스를 들려준다.
꽤 긴 이 작품을 몇 군데 압축하여 한 장의 LD로 만든 것도 애호가들에겐
장점이 될 수 있겠다.
CD는 몇 종이 있지만, 우리에게 인기가 적기 때문인지 잘 수입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솔티 판(데카)은 위의 LD와 같은 녹음이다.
레바인 판(DG)은 토마스 알렌, 미렐라 프레니, 닐 쉬코프, 안네 소피 폰
오토, 파타 부르출라제의 초호화 배역이다.
비쉬코프 판(필립스)도 좋은데 드미트리 호보로스토프스키를 내세우고 누
치아 포실레, 닐 쉬코프 등이 공연하고 있다.
맥케라스 판(EMI)도 있는데 토마스 햄프슨 등이 녹음했다. 연주는 아주 뛰
어나지만 영어로 노래했으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오페라는 원어의 뉘앙스
까지 살아야 제 맛이 난다.
<자료원 : 네이버 카페 클래식 동호회 "슈만과 클라라">
'가꾸는 꿈 > 클래식 음악, 아는 만큼 들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래식과 일상의 인문학...TNC포럼 (0) | 2017.03.10 |
---|---|
오페라 <토스카> (0) | 2007.11.04 |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은 미완성 (0) | 2006.11.04 |
클래식을 향한 첫걸음 4 - 클래식 소품 30선 (3) (0) | 2006.04.09 |
크리스마스를 위한 클래식 추천 음반 II (0) | 200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