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엄마 뱃 속에서 세상으로 나올 때 처음 울음소리를 낸다. 물론 듣는 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지만...... 이 소리에 처음 엄마가 된 모든 여성들은 가장 기뻐하고 오래도록 기억한다.
이후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소리와 부딪히며 함께 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세상은 어떨까? 아마도 삭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리와의 절연은 아닌 것이다. 無音의 세상에서 음악소리도 없고, 아이들의 사랑스런 외침도, 엄마의 야단도, 무대에서의 공연도 소리없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할 수도 없다.
소리는 우리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이고, 실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소리, 즉 "音"을 두번째 주제로 정했다. 왜?
하필이면 그 音을 플루트란 도구로 보여주려 하는가?
플루트(flute)가 무엇이길래? 청중들에게 어떻게 다가서길래?
사실 플루트 독주 자체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 모니터 기회가 제공되었을 때부터 이런 고민을 쭈욱 해 왔다. 왜 플루트 독주의 모니터를 신청하였을까? 그건 플루트에 대한 나의 환상때문이었다. 은빛 막대에서 반사되는 빛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비춰졌고, 그 소리 역시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순수의 최절정이라는 이미지.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플루트에 대한 이미지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수없이 그런 이미지가 덧칠되어 우리에게 전해 졌고, 난 어쩌면 아무런 저항없이 그 영상 속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깨어 있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만큼 들릴 것이다라는 대명제를 전제로 열심히 플루트를 웹에서 검색해 봤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로 설명된 것들 뿐이었다.
공연시작 시각이 임박한 7시 55분. 관객수가 매우 적었다. 무대 위엔 피아노와 악보스탠드 그리고 공중에서 V자로 연주자 높이에 알맞게 내려진 마이크가 전부였다.
아주 빛나는 은빛 플루트를 들고, 반짝거림이 느껴지는 바다색 원피스 차림의 김주원 플로티스트가 나타나고 박수가 쏟아졌다가 이내 조용해 졌다.
첫번째 연주곡(플루트). 긴장감이 팽팽한 가운데, 첫 음이 울린다. 시작부터 아주 짧고 빠르게 전개된다. 여운이 짧거나 거의 없다. 짧고 경쾌하다고 해야겠지. 아주 짧은 순간 플루트는 여운없는 악기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중간중간 연주중인 플루티스트의 호흡소리가 쉼없이 전해진다. 처음에는 거칠게 의식되던 그 호흡소리가 차츰 연주에 빠져 들면서 내 의식속에서 사라졌다.(Carl Philipp Emanuel Bach, Sonate a-moll)
두번째 연주곡(플루트+피아노). 서정적인 로맨스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음색이다. 첫번째 곡에 대한 반전 내지 반발이 아닐까? 길고 부드러우며, 귓가를 타고 흐른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맑고 단아한 음이 이어지면서 피아노 반주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특히 중간 부분에서 흐르는 피아노 선율의 여운에 따라 다시 플루트의 연주가 시작되는데, 그 여운을 타야 하는 연주자에겐 여운 따라잡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자연스러움을 거슬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연주 속으로 빨려드는 동안 언제나 그렇듯이 내 머릿속은 하나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어린 시절 흑백TV에서 보았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란 애니메이션 작품 속의 알프스 산 속. 뒤로는 하얀 눈이 덮인 산꼭대기가 있고 그 아래 양치는 목동이 살며, 그 옆으로는 아주 높은 침엽수림들이 모여 사는 숲이 그려진다. 참 좋은 영상이다. 팬플루트보다는 더 맑은 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Robert Schumann, 3 Romanzen Op.94)
세번째 연주곡(플루트+피아노). 앞의 두 곡을 섞어 조화를 이룬 듯한 선율이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져 일으키는 파문의 물결처럼 높낮이와 강약이 오르내린다. 피아노 선율이 플루트음보다 강하고 높고 빠른 듯 싶더니 그 뒤를 이어 플루트가
약하고 낮고 느림을 보이다가 연이어 플루트가 다시 강하고 높고 빠르고, 다시 피아노가 약하고 낮고 느림을 보이는가 하면 다시 피아노가 강하고
높고 빠른 음을 내는 이런 반복이 한동안 지속된다. 마치 재즈의 반복처럼...... 참지 못하는 격정과, 깊은 가을날 가로수길을 걷는
느낌의 서정성이 오버랩되는가 싶더니 연이어 독일의 부르크(성)를 배경으로 보여주는 듯한 독일 음악적인 느낌이 잠시 스쳐 지난다.
그리고 다시 경쾌한 민요풍의 춤곡 같은 느낌이 흐르며 마치 맨발로 푸른 풀밭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극단적이면서도 적절한 강약의 조화와 함께 지속되다가 피날레에서는 강하고 빠른 여운없는 강인한 끝맺음으로 그 열정을 토해 낸다.(Paul Taffanel, Fantasie Sur Le Freyschytz)
네번째 연주곡(플루트). 피아노 반주없는 플루트 독주. 아주 길고 낮은 음소리가 연주된다. 마치 짧음을
비판하듯이 초기에는 우리의 대금소리와 비슷하기도 한, 영화 서편제에서 恨을 승화시키는 듯한 울림소리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강하고 짧은, 그래서
매우 높은, 마치 쇳소리같은 음소리가 연주되다가 다시 평온한 장음(長音)이 이어진다. 극단적인 느림, 길게 가다가 짧게 끊는다. 저음에서
쇳소리가 날 만큼의 고음으로의 빠른 전환. 이는 리코더를 처음 배울 때 나는 삐-익 소리와 흡사하다. 극적이다. 짧은 단 한 음에서 아주 잠깐
빠른 리듬을 보이다가 엉? 마치 관 막대로 치는 듯한 소리가 연주된다.
"뿌웍", "뿌웩", "뿌웨이익" ......
이 소리도
투박하고 조금 약하나, 맑고 강한 소리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절묘한 조화를 보인다. 정말 복잡한 형식의 곡으로서, 연주되는 내내 아무것도 영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추상화 같다고나 할까?(Cristibal
Halffter, Debla for Flute
Sole(1980))
다섯번째 연주곡(플루트+피아노). 부드럽고 서정성이 풍부한 음색의 아름다운 선율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크 양식인가?하고 여길 무렵 갑자기 빠르고 경쾌하나, 낭만적인 선율을 피아노가 이끈다. 플루트는 길라잡이 피아노의 음을 뒤따라 잡는 듯한
느낌이다. 쟁반 위에서 구슬 구르는 듯한 피아노의 맑은 음 속에서 연주되는 강하고 빠른 그러나 때론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운 플루트 소리와의
조화가 돋보인다. 플루트의 여러 연주법이 모두 사용된 듯 한데, 전문지식 부족으로 악장별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2악장은 정말 독특하다. 전반적으로는 빠른 속주이나 부드러움과 경쾌함이 지속적으로 흐르고, 강하게 가다가 다시 부드럽고 느리게 연주된다. 최고의
기교가 필요한 부분인 듯 싶다. 다시 빠르나 짧고 경쾌한 단음의 연속이 이어지는데, 크로아티아가 나은 세계적인 속주 피아니스트
"막심(Makshim)"의 마지막 절정후 짧고 강하게 끝나는 마침 연상시킨다.
3악장은 낭만적인 선율이 끊임없이 길게 연주된다.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세레나데의 선율 그대로다. 여기에 편안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4악장은 중간
정도의 연주속도에서 최고의 속주로 이어지다 절정에서 멈춤이 있다. 잠시의 침묵 뒤에 피아노만의 선율이 연주되고 그 뒤를 빠른 플루트 연주가
따른다. 극단적인 오르내림은 아니나 전반적으로 속주다. 복잡적이나 단조움이 가미되었으며, 반복은 거의 없었다.(Sergei Prokofiev, Sonata No.2 Op.94(1942-1944))
음악에 문외한인 관계로 전문지식이 바탕이 되지 못한 후기이다 보니 두서없이 쓴다. 그러나 한 가지. 오늘의 테마가 "소리(音)"였는데 정말 다양한 플루트의 소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관음보살이 소리를 본다고 하는데, 이는 고통받는 중생의 신음소리를 보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미라 한다. 오늘의 공연에서 정말 다양하고 복잡하며 폭넓은 플루트의 音은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소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끝으로 이 날 공연장에서 생겨난 괜한 의문을 제기하며 마친다.
협주과 독주에서의 반주의 실제적인 차이 내지 경계점은 어디인가?(국어학적 풀이가 아닌 실제
공연에서의)
무반주에서의 플루티스트 연주자의 호흡소리는 청중에게 들리지 않게 할 수 없을까?
악보가 연주자의 연주속도에 맞추어
연주자앞에서 영상으로 보여진다면 악보를 넘겨줄 보조자가 필요하진 않을텐데?
이 날 연주에서 반주인
피아노의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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